나의 외로움에 눈이 내려 덮였다.
2013년 11월 18일에 서울에는 첫 눈이 내렸어.
"그랬다. 모든 끈이 끊어져 있었다.
모두 끝났다. 공부, 운동에 동참하는 것, 일, 우정, 모두. 사랑도, 사랑을 찾아 헤매는 것도 끝이었고, 한마디로 의미 있는 인생의 행로 전체가 끝난 것이었다. 내게 남은 것은 시간뿐이었다. 그런데 이 시간, 그것을 나는 이전의 그 어느 때보다 더 내밀하게 알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더 이상 예전에 내가 알았던 시간, 일로 사랑으로 온갖 노력들로 탈바꿈된 그런 시간, 내가 하는 일들 뒤에 살그머니 숨은 채 얌전히 있어서 그저 무심코 받아들였던 그런 시간이 아니었다. 이제 그것은 옷을 다 벗고, 그 자체로, 자신 본래의 진짜 모습으로 내게 오고 있었고, 나로 하여금 그것을 자신의 진정한 이름으로 부르게 만들어(이제 나는 순수한 시간, 순수하게 텅 빈 시간을 살고 있었으므로), 내가 단 한 순간도 그것을 망각하지 않으며 계속해서 그것을 생각하고 끊임없이 그 무게를 느끼도록 하고 있었다.
음악이 들릴 때 우리는 그것이 시간의 한 양태라는 것을 잊은 채 멜로디를 듣는다. 오케스트라가 소리를 내지 않게되면 우리는 그때 시간을 듣게 된다. 시간 그 자체를. 나는 휴지(休止)를 살고 있었다. - 농담, 밀란 쿤데라
나는 이 책을 좋아했어. 지금은 좋아한다고는 말 못하겠어, 대부분의 내용이 머리에서 사라졌거든. 하지만 읽을 당시에 적어두었던 몇 몇 구절은 아직도 많이 좋아해.
너에게 이 내용을 보내주었을 때, 너는 화자가 우울에 젖어있는 것은 알겠지만, 맥락 없이 이해하기 힘든 문장들이라고 얘기했던 것 같아. 나는 앞뒤가 기억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글이 마음에 와닿는데 말이야. 내가 꼭꼭 손으로 눌러 써 놓은 이 문장들에는 기억이 담겨 있어서 그런가봐.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냄새가 있고 노래가 있지. 아주 강렬한 감정적이고 감각적인 표식들. 이 짧은 글이 나에게는 그정도로 강렬해. 모든 기억을 불러일으킬 만큼.
나는 그 때 시간이라는 게,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
그렇게 텅 비어있는게 그토록 무거울 수 있다는 것도.
종이에 써둔 글자들을 타자로 옮기면서, 너에게 보내면서, 그다지 대단한 생각을 한 건 아니었어. 이 글에 담긴 내 모든 기억과 감정과 상황을 전달한다는 욕심은 그야말로 언감생심이었고, 그냥 내게 이런 순간이 있었다는 것 정도를 말하고 싶었던 것 같아. 이해를 구하려고 했던 건 아니었어.
당시에 썼던 다른 글들을 보는데 어린 내가 보이더라. 글에서 어찌나 어리다는 게 드러나는지, 별 내용 아닌데도 조금 부끄러워지기까지 했었어. 내가 요새 쓰고 있는 이 글들도 나중에 읽으면 그럴까? 당연히 정제된 글과 막 쓴 글은 다르겠지, 가끔 수첩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일기를 읽다보면 마음에 드는 문장도 있고 그냥 기록에 지나지 않는 것들도 있듯이. 언젠가 내가 그 글들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게 될 날이 왔으면 좋겠다는 게 불가능한 희망 중에 하나야. 그리고 네가 그 글들을 완전하게 이해해 줄 수 있는 순간이 왔으면 좋겠다는 게 두 번째 불가능한 희망이지.
오늘은 11월 1일이야. 2013년 11월 18일에 서울에는 첫 눈이 내렸어.
나는 그 때 혼자였어. 혼자 창문을 보면서 생각했지. 뭐가 저렇게 휘날리는거야, 벌레라고 하기엔 너무 많은데. 그리고 곧 그게 싸락눈이라는걸 깨달았고, 눈송이들은 보란듯이 커지더니 함박눈이 되었어. 너에게 이런 얘기를 하고 싶어. 싸락눈이니, 함박눈이니 하는 단어들. 그리고 혼자서 창문을 통해 눈을 봐야 했던 나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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