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Living through/Archives

겨울이 온다

by Gwen_서진 2023. 3. 7.

        겨울이 온다. 두터워지는 옷깃에서, 차가워진 하늘에서 뿐만 아니라, 그냥 지나칠 뻔 했던 내 발길을 잡아 세운 광고판에서도 겨울은 온다.

다이어리. 나의 하루. 나의 일년. 나의 기록.

감각적이고자 노력한 광고 문구는, 세련된 컬러블록을 배경으로 감상적인 글씨체로 적혀 있었다. 12월에 접어들었지만 그다지 춥지 않은 날씨 덕분에 시나브로 변하고 있는 계절을 두고 한 해가 끝나가고, 또 시작될 거라고, 그러니 지금은 겨울이라고 못박는 듯한 단어들이었다. 바람이 코트 사이로 훅 들어와 어깨가 파르르 떨린다. 목요일의 퇴근길은 이상하게 썰렁한 느낌이 든다.

 

        해질녘의 하늘은 그다지 붉은 빛을 띄지 않았다. 다 같은 사각형이지만 온갖 높이를 하고 있는 건물들의 실루엣이 저녁 하늘을 갈라내어 밤이 오고 있음을 알린다. 하지만 밤은 쉽사리 오지 않는다. 촘촘히 붙어있는 창틀 사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형광등 빛이 어둑해지려 애쓰는 하늘을 계속 밝힌다.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에서 나는 아래를 보고 걷는다. 양 발 끝이 타박타박 번갈아 시야에 들어온다. 여름이었다면 아직 환해야 마땅할 아스팔트는 짙은 회색 빛이고, 가로등은 이미 특유의 주황빛으로 그 위에 그림자를 빚어내고 있었다. 나의 기록. 광고 문구를 되새겨본다. 일기를 써볼까. 매일 가방에 가지고 다니지만 한동안 펼쳐보지 않은 무지의 크림색 공책은 한 해가 지나가는데도 아직 몇 장 채워지지 않았다. 일지를 쓰려고 한 건데 계간지가 되어버렸다.

 

         을지로를 걸어 미리 찾아 둔 카페로 들어간다. 카페의 따듯하면서도 왠지 고풍스러운 분위기도 마음에 들었지만, 40년대 풍의 음악이 흘러나오는 그 공기가 날 완전히 사로잡았다. 아코디언 소리와 피아노 소리, 이국적인 낱말들이 테이블을, 커피잔을, 내 공책과 펜과 그것들을 움켜쥐고 있는 내 손과 몸통을 모두 붙잡고 녹여서 바닥까지 닿도록 만들었다. 약간 노이즈가 들리는 마이크에 대고 소리치는 날 것의 목소리들. 거기서 나는 반복되는 일상을 적어 내려간다. 다시는 읽고 싶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들춰보며 눈물짓게 될 이야기들을 기록하기 위해 공들여 고른 종이 위로 만년필을 사각거리며 움직여본다.

 

         카페의 턴테이블은 가끔씩 튄다. 축음기와 LP판의 예상지 못한 불협화음조차 재즈의 즉흥성을 내포하는 기분 좋은 사고가 아닐까 꿈보다 좋은 해몽을 한다. 꿈보다 해몽이지, D의 말버릇이었다. 나는 그의 낙관성을 싫어했고 그는 내가 현재를 살지 않는다며 나무랐다. 나는 그 말에 수긍하면서도 또 앞 장을 들춰 집약된 과거의 나를 훑어본다. 올해가 시작될 때 즈음에 한 살 더 먹는 것에 대한 한탄을 끄적여 놓았던 서른 살의 나는 몇 달간 자라 더 이상 나이 먹음에 한탄하지 않는 서른 살의 내가 되어 있었다. 스무 살의 겨울은 온통 설렘과 기대로 가득했는데, 서른 살의 겨울은 내가 서른 살이 되어도 되는 걸까, 하는 의문만 가득했다. 공책 위에 어지러이 말라붙어있는 잉크의 농담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이러다간 나도 이 잉크처럼 되고 말 거야. 아무도 들춰보지 않을 종이를 가득 채운 찐득거리는 흔적.

 

         그래서 나는 바닥에 녹아 엉겨붙어있는 나를 일으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D와 호프집에서 손도 대지 않을 오징어를 시켜 놓고 웰치스를 마시기 위한 약속을 잡아야 했던 것이다. 나는 자주 D의 말을 따라가지 못해서 의미없는 미소를 짓거나 아무 말이나 대거리를 해대지만 어찌저찌 우리의 대화는 죽이 맞는 편이다. 길게 우회하는 시골길 같은 우리의 대화는 자정이 다가오면서 끝을 맺어야 했고, 어정쩡하게 매듭짓다 말아버린 리본같은 모습으로 남았지만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택시를 앞에 두고 D와 나는 작별인사로 깊은 포옹을 나눴다. 따뜻했다. 아, 날씨가 춥구나, 하고 생각했다. 겨울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