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Living through/Archives

[너에게 썼던 편지] 불안하게 살기

by Gwen_서진 2023. 2. 28.

가끔씩 나는 휘몰아치는 불안에 갇혀 허우적거릴 때가 있어. 보통 나는 항상 해야 할 일들의 목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불안은 내 생산성에 타격을 줄 때가 많아.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처럼. 나는 지금 시험을 치르기 위해서 공부를 해야 하는데, 어차피 불안해서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할 것이라면 이 감정을 써내려가고 그러면서 뭐가 문제인지 찾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

불안에 대한 유명한 책인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을 읽었을 때 많이 공감했던 기억이 나. 어떻게 보면 사람은 불안하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는 게 당연하지만, 가끔, 아니 자주 일어나는 문제는 내가 불안 자체에 압도당한다는 거야. 왜 불안한지 뭐가 불안한지 아무것도 모른 채 그냥 그 감정에 압도당하는 거지. 그러면 나는 안전부절 못하면서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가 내려놓았다가, 펜을 들었다가, 생각을 하려고 애쓰다가 그래. 그리고 옛날 생각이 가끔 떠올라.

 

그래서 우리의 요구와 세상의 불확실한 조건 사이의 불균형은
지위에 대한 불안을 끈질기게 들쑤시는 다섯 번째 이유가 되는 것이다.

라는 책의 구절에는 많은 것들이 드러나. 우리의 불안에는 ‘지위에 대한 불안’이 존재한다는 것, 지위는 우리의 욕망이고 지위를 얻기 위한 투쟁 가운데에서 내가 승리할지 패배할지 알 수 없다는 불확실함이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는 거야.

사실 내 불안의 원인은 아주 대단한 게 아니라는 걸 알아. 내가 해야 할 일을 충분히 하지 못할까봐, 그래서 종국에는 어떤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실패하는 사람이 될 까봐 그게 두려워. 정확히 말하자면 스스로 배정받은 할당량을 채우지 못할까봐, 그만큼 내가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까봐 불안해. 왜 나는 노력하지 않는 걸까? 그게 이어지는 의문이지. 앞에서 떠오른다고 했던 옛날 생각이라는 건 결국, 노력했던 내 모습에 대한 기억이거든.

 

학생 때 나는 물리학이 너무 어려웠어.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지. 그래서 나는 물리학을 잘 하는 친구에게 물어보기도 하고, 혼자 고민하면서 시험 전 날 밤을 새우고 있었어. 시험을 못 볼까봐 걱정되고 물리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내 자신에게 속이 상해서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옆자리 친구가 그런 나를 보며 참 독하다고 얘기했었어. 물론 그 때 그렇게 스스로를 몰아붙였던 사실이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거나, 그걸 어떤 의미로든 자랑스럽게 여긴다거나 하는 건 아니야. 그렇지만 스스로에게 떠오르는 질문은 막을 수가 없어. 그 때의 나는 어딜 갔을까? 불안함을 무릅쓰고 할 일을 해치우던 내 모습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그 때 내게 가장 큰 불안은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하면 어떡하나, 이거였던 것 같아. 고등학교는 내 세상의 전부였고 그 세상에 있는 길은 전부 대학이라는 목표로 향하고 있었어. 어쩌면 그 목표를 향한 욕망이 너무 커서 불안을 무찔러버렸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만약 그렇다면, 지금은 목표를 향한 욕망이 그다지 크지 않아서 불안이 나를 덮어버리는 거겠지. 그런데 앞서 말했듯이 불안이 지위에 대한 욕망에서 어느 정도 기인하는 걸 인정한다고 해도, 불안이라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기는 쉽지 않아. 어떻게 보면 불안하다는 건 아주 당연한 상태야. 그 불안을 얼마나 덜 불안정하게 관리하느냐 하는 문제지.

인생은 하나의 불안을 다른 불안으로, 하나의 욕망을 다른 욕망으로 대체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불안을 극복하거나 욕망을 채우려고 노력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노력은 하더라도 우리의 목표들이 약속하는 수준의 불안 해소와 평안에 이를 수 없다는 것 쯤은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여전히 문제는 남아있어. 불안함을 일으키는 게 욕망의 충족 가능성에 달려있는 거라면, 어떤 것을 욕망하느냐라는 것이 또 다른 문제잖아.

물질적인 관점만이 아니라 정서적인 관점에서도
우리가 세상에서 차지하는 자리에 대해 불안해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이 자리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는지 결정하며,
결과적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좋아할 수 있는지 아니면 자신에 대한 신뢰를 잃을 수밖에 없는지 결정한다.

 

이 정서적인 지위라는 것은 자칫하면 남에 의해 좌우되기 쉽기 때문에 더 강하게 나를 좌절시킬 수 있는 요소야. 그리고 내가 요즘, 혹은 항상 불안해하는 부분이기도 하고. 재미있는 점은, 나에게 훌륭한 지위가 주어졌을 때조차도 불안함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야. 이 자리가 나에게 맞는 걸까? 이걸 다시 ‘빼앗기진’ 않을까? 여기에 두 가지 요점이 있지. 하나는 내가 나 스스로를 훌륭한 자리를 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여기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내게 지위를 ‘주는’ 존재가 외부에 위치한다는 것. 이건 아주 어려운 문제야. 내가 나는 소중한 존재이고, 내 지위는 내가 결정하는 거야, 라고 아무리 생각한다고 해도, 나무 바닥 틈새로 흘러내리는 모래더미처럼 그 생각들은 계속 빠져나가거든. 의식적으로 그걸 붙잡으려고 해도 무의식적으로 흐르는 모래들의 속도를 쫓아갈 수가 없어. 천천히 바꿔나가면 된다고, 나무 바닥을 보수해야 하는 문제라는 얘기는 들어왔지만 나는 아직 답을 찾지 못했어.

 

어쩌다 보니 이 글이 알랭 드 보통이 쓴 책에 대한 독후감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마지막에도 책 한 구절을 인용하고 싶어.

 

자신이 하찮은 존재라는 생각 때문에 느끼는 불안의 좋은 치유책은 세계라는 거대한 공간을 여행하는 것,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예술작품을 통하여 세상을 여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끔 나는 우주를 생각해. 내가 배웠던 천체들에 대한 모든 것들과 사진, 영상, 그리고 우주 자체 존재. 광활하다는 말 따위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무한함. 그 속에 있을 때 모두는 나와 비슷한 존재가 되어버리거든. 나는 불안해. 불안하게 사는 사람이야. 그렇지만 이제는 그 불안을 여행하고 싶어. 힘든 여행이 되겠지만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