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Living through/Daily records

보스턴 티 파티

by Gwen_서진 2023. 2. 17.

 

“저기, 대화 중에 방해해서 미안한데 혹시 우유 좀 나눠줄 수 있을까?”

“그럼, 물론이지!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난 코비드 백신 접종 완료자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고마워. 아침에 던킨에서 산 커핀데 정말 못 견딜 정도로 맛이 없어.”

“그렇구나, 그럼 우유를 많이 섞도록 해. 혹시 베이글도 먹을래?”

    보스턴 시내 근처의 호스텔 주방에서 처음 더스틴에게 말을 걸 때, 나는 너무 긴장해서 땀이 난 손바닥이 살짝 떨리기까지 하는 걸 느꼈었다. 더스틴과 앵거스가 그 떨림을 눈치채지 못했기를 바라면서 최대한 친근한 모습으로 인사를 이어 나가려고 노력했다. 서로 만난 지 10분이 채 되지 않았지만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그들과 친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언제나와 같이, 나는 물이 흘러넘치기 직전의 컵처럼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를 이상한 애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어제 계획한 만큼 공부를 다 못 했는데 오늘 다 할 수 있을까, 별로 가고 싶지 않지만 유명한 미술관이 있으니 가는 게 좋겠지, 따위의 생각이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떠 다니고 있었다. 계획 없이 자유로운 여행을 하리라 마음먹고 보스턴에 왔지만 나는 여전히 긴장한 채로, 습관이 되다 못해 인이 박혀버린 ‘사서 걱정하기’를 하고 있었다. 이럴 때면 괜히 맥주가 생각났다. 도수가 조금 높은 편인 IPA 맥주 글라스를 손에 들고 대화를 하고 싶다. 내 손짓이 덜 어색하게, 침묵이 감돌 때 입술을 축일 수 있게, 긴장이 풀리고 사람을 대하기 조금 더 편해지게. 다행히 나보다 훨씬 외향적이고 사교적인 그들이 베풀어 준 호의 덕분에 짧은 대화 후에 더스틴과 나는 하버드 대학교 캠퍼스가 위치한 케임브리지로 가는 지하철 의자에 함께 앉게 되었다.

 

    커다란 캠퍼스는 서울에서 주로 봤던 대학교 캠퍼스들과는 다르게 학교 건물들과 주변 거주지역의 경계가 그다지 명확하지 않았다. 추운 날씨였지만 청명한 하늘 아래서 한참을 걸으니 오히려 땀이 날 것 같았다. 평소에 방향을 잘 찾지 못해 지도를 보는 게 습관이었는데, 누군가가 함께 있어서 그런지 무작정 캠퍼스를 쏘다니면서도 길을 잃었다는 생각에 불안해하지 않는 내 모습이 조금 놀라웠다. 갈림길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서로에게 왼쪽, 오른쪽, 어디가 좋아, 하고 묻고는 조금 더 예뻐 보이는 방향을 골라서 걸어 다녔다. 구두 끝을 쓰다듬으면 미래의 자식이 하버드 대학에 입학한다는 동상, 공책부터 마스크까지 온갖 상품들이 하버드 마크로 장식되어 있는 학교 서점, 커다란 몸뚱이에 어울리지 않게 작은 머리의 벌쳐 무리가 둥지를 틀고 있는 나무들을 지나 계속 걷고, 계속 얘기했다. 위화감이 느껴질 정도로 불균형적인 큰 날개와 작은 부리의 벌쳐 vulture가 꼭 나 자신 같았다. 한 편으로는 한국에서 보지 못했던 새이기에 신기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주택 울타리며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행인들이 새로이 보였다. 내가 알고 있던 세계와는 확연히 다르지만 자신들만의 균형을 이루고 있는 새들, 사람들, 이 도시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내게 위로가 되었다. 학교 건물의 종탑이 눈에 들어오자, 목적지가 없어도 즐겁게 걸을 수 있구나, 길가의 종소리가 목적지가 되어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눈앞에 하버드 인터섹션이 나타났다. 더스틴이 처음부터 꼭 가보고 싶다고 했던 광장이었는데, 우리가 지하철역에서 나와 걸어간 방향의 반대편에 있었던지라 근처 한 바퀴를 뱅 돌아서 도착한 것이었다. 햇살에 매끄럽게 빛나는 진녹색의 벤치에 앉아서 땀을 식히며 생각했다. 재미있게 걷다 보면 목적지를 마주치기도 하는구나.

 

    “저 건물은 황금색이네, 사원인가?”

    “아니, 지도 보니까 주 정부청사라는데.”

    “맙소사, 엄청난 미적 감각인걸. 그래도 자갈돌로 되어있는 길은 마음에 들어. 고풍스럽잖아.”

    저녁에는 앵거스도 합류해서 우리 셋은 시답잖은 얘기를 나누면서 계속 걸었다. 해 질 녘의 보스턴은 아름다웠다. 인스타그램에 올릴 만한 사진을 찍을 수 있을 만큼 입이 딱 벌어지는 풍경은 아니었지만 그런 잔잔함이 더 마음에 들었다. 어스름이 내려온 보랏빛과 분홍빛의 저녁 하늘도, 땅거미가 져 어두운 시내 방향에서 반짝이는 빌딩들도, 그 빌딩들의 조명이 비치는 잔잔한 찰스 강물도 하나같이 너무 잔잔해서 꼭 기억에 새기고 싶었다. 일렁이는 물가를 걸으면서 우리는 농담을 던졌다. 1773년에 보스턴 사람들이 영국 배에서 차를 다 바다에 쏟아버려서 ‘보스턴 티 파티’ 사건이라고 부르잖아. 물고기들이 그 찻잎으로 다과회를 했다고. 우리도 티백을 가져왔어야 하는데 말이야. 보스턴에 왔으면 티 파티를 해야지. 유쾌하게 말하는 더스틴에게 그러게, 하고 맞장구를 치면서 이들과 다과회를 한다 해도 정말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사람들과 차만 마셔도 즐겁게 얘기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맥주 글라스를 손에 들고 독한 술기운을 빌리지 않아도 나를 조금 풀어놓고 편안해질 수 있는 법을 체득하고 있는 것 같았다. 굳이 주제를, 목표를,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말하고 걷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해산물이 유명하다는 보스턴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는 우리의 저녁 메뉴는 고기, 소시지, 햄, 그리고 베이컨이 올라간 슈퍼 슈프림 미트 피자였다. 보스턴으로 출발하기 전 랍스터 롤과 클램 챠우더 맛집을 찾아보고 후기를 읽느라 핸드폰 화면 속으로 파고들어 가던 나 자신이 생각나 조금 웃음이 나왔다. 이번 여행에서는 결국 랍스터도, 클램 챠우더도 먹지 못하고 돌아가게 되었지만, 아쉬움이 들진 않았다. 그렇게 일요일 밤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다음 날 새벽이면 각자 버스를, 기차를 타고 우리가 떠나온 도시로 돌아가야 하기에 작별 인사를 나눌 시간이었다. 서울에 가서 일도 하고 여행도 잔뜩 다니고 싶다는 더스틴과 앵거스에게 추천해 주고 싶은 동네 명소들이며 맛집 목록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이내 다시 생각을 접어 넣었다. 이 친구들이라면 지도에 별 표시를 찍어주지 않아도 누구보다 더 아름다운 서울의 모습을 발견할 거고, 어느 줄 서는 맛집의 유명 요리보다도 더 맛있는 추억이 되어 줄 백반집을 찾아 저녁을 먹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인사는 담백하게 시작해서 웃음으로 끝났다.

    “만나서 반가웠어. 조심히 돌아가고 잘 지내.”

    “나도 반가웠어. 서울에 대해서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걸. 내가 성가실 정도로 연락해서 물어볼 테니까 말이야.”

    “기다릴게. 잘 가.”

'Living through > Daily record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애플워치와 습관의 과학  (1) 2023.03.06
2018년의 딸기빙수  (0) 2022.09.04
미국에서 그리워하는 한국적인 것들  (0) 2022.09.04